듣는 이 별로 없어도 광야에서 혼자 중얼거려 봅니다. 반박시 여러분 말이 다 맞습니다.

눈물로 부르짖는 자리에 교회는 없었다

며칠째 올림픽공원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 중심에는 2030 청년들이 있다. 누가 모으지 않았고, 누가 지휘하지 않았다. 6.3 지방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를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황당함, 투표함이 옮겨지고 보관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꼈던 불안과 의혹, 그 가운데서 일어난 폭력과 부정함—이 모든 것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누군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외침에 또 다른 누군가가 응답했다. 주동자도 없이, 지휘부도 없이, 그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며칠을 이어가고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 말씀에서 멀어지는 길

지난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올랜도에서 열린 2026년 남침례교(SBC) 연례총회는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되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지켜보며, 나는 한국 교회, 특히 한국 침례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과 정반대의 흐름을 보았다. 오늘은 그 풍경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태복음 16:3)

교회 밖은 지금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가

2026년 5월,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전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평소라면 침묵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사저에 머물던 전직 대통령들이 부산으로, 원주로 나선다. 이 사회의 시민들은 지금 이 시간이 평범한 시간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그 감각이 옳든 그르든, 정확하든 과장되었든, 사람들은 지금 뭔가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강단 아래의 권력 게임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이며, 십자가의 질서로 세워진 몸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 안에서는 강단 위의 설교와 달리, 강단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작동한다. “누가 몇 년 차인가”로 서열을 나누고, 파벌을 형성하며, 새로 온 사역자를 길들이고, 심지어는 훗날 자신의 ‘성전’을 하나 차지할 것처럼 암묵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는 모습까지 나타난다면, 그것은 단순한 조직 갈등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본질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다.

숫자가 신이 될 때

교회가 숫자를 중시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성경에도 회심자의 “수”가 언급되고(행 2:41), 복음이 확장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행 6:7). 문제는 숫자가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숫자가 신뢰의 기준이 되고, 숫자가 의로움의 증거가 되고, 숫자가 하나님의 승인처럼 취급될 때, 교회는 어느새 “복음 공동체”가 아니라 “동원 조직”으로 재정의된다.

두 교단의 선택, 두 교단의 미래

1993년 3월, 미국 루이빌. 서던 침례신학교(SBTS) 이사회는 33세의 젊은 청년을 제9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알버트 몰러. 그는 취임 직후 교수진 전원에게 신앙고백서 서명을 요구했다. 거부하는 자는 떠나야 했다. 700명의 학생이 줄었다. 교수들의 불신임 투표가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미디어 헬기가 잔디밭 시위 현장을 날았다. 몰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 한 질문에 집중했다. “이 신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잔디밭의 시위대의 것인가, 교회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