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은 쇼 무대가 아니다
유명하고 재밌으면 된다는 한국 교회의 치명적 착각
한국 교회 안에 이상한 풍경이 굳어지고 있다.
어느 교회의 특별 집회, 어느 기도회, 어느 연합행사의 강사 명단을 들여다보면 그 스펙트럼이 놀랍도록 넓다. 신사도운동 성향의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정통 복음과는 거리가 먼 번영신학 부흥사가 있고, 신학적 검증이 불가능한 간증자가 있으며, 심지어 개신교 울타리 밖의 종교인까지 강단에 서는 일이 낯설지 않다. 이 다양한 이들을 한자리에 묶는 공통 기준이 딱 하나다. 유명하다. 재밌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
이것은 종교적 관용이 아니다. 이것은 신학적 무책임이다.
강사 선정이 신학을 말한다
어떤 유명한 집회 공식 자료에서 강사 선정 기준을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다양한 강사들.” 체험이 기준이다. 고백이 아니다. 교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바르게 선포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강단에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기준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강사 명단이 증명한다. 교단이 모 기도회를 공식 경계 단계로 지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강사 초청”이었다. 신사도운동과 연계된 인사들이 전국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 서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성도들은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은혜받았다’는 감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른 어떤 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회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담임목사 자신이 이단으로 규정된 모 아카데미 수료 이력이 있으며, 전문가들은 그를 가리켜 “이단에 대해 선명한 신학적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한 목사”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신학적 지형 위에 세워진 플랫폼이 강사를 선정할 때 신학적 기준이 작동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강단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은 강단(pulpit)을 교회의 가시적 표지 가운데 하나로 이해했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거꾸로 말하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없거나, 있더라도 위기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강단에 누가 서는가는 단순한 행사 기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의 문제다. 어떤 신학을 지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를 허락하느냐는, 그 교회 혹은 그 집회가 어떤 복음을 믿는다고 선언하는 행위다. 이름뿐인 기독교인을,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간증자를, 심지어 성경적 복음과 배치되는 구원론을 가진 종교인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설교의 권위를 허무는 것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그는 심지어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했다. 이것은 신학적 극단주의가 아니다. 복음에 대한 정직한 무게감이다. 강단에 서는 자가 누구냐는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할 문제다.
“연합”과 “혼합”은 다르다
초교파 집회나 연합 기도회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합이 성립하려면 무언가를 공유해야 한다. 그 공유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성경의 권위 — 이런 것들이 공유될 때 연합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준이 “유명하다”, “은혜롭다”, “사람이 모인다”로 대체될 때,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혼합이다. 혼합주의(syncretism)는 언제나 복음의 독특성을 갈아먹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재미있으면 다 된다”는 문화가 한국 교회 안에서 강단을 점령하고 있다. 설교가 웃겨야 하고, 간증이 드라마틱해야 하고, 강사가 유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학은 기획자의 체크리스트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저 사람의 구원론은 무엇인가. 저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보는가.
이 질문들이 사라진 자리에 구경꾼만 남는다. 구경꾼은 은혜를 소비하지만 복음에 뿌리내리지 않는다.
묵과할 수 없는 이유
이것이 단지 개인 취향이나 스타일의 차이라면, 굳이 비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강단에 서는 사람의 신학은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성도에게 영향을 미친다. 신사도운동 성향의 강사가 수만 명 앞에서 말할 때, 그 파급력은 개인의 서재에서 이단 서적 한 권을 읽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대규모 집회의 강단은 복음을 대량 유포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거짓을 대량 유포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 둘 사이에 있는 유일한 방호벽이 신학적 분별력이다.
한국 교회가 이 방호벽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 유명한 사람이라면, 재밌는 사람이라면, 은혜로운 사람이라면 강단에 세운다. 심지어 복음주의 개신교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마저도 예외가 되지 않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이 묵과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신학적 스펙트럼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의 훼손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단은 쇼 무대가 아니다. 강단은 살아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다. 그 자리에 서는 사람이 어떤 복음을 갖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배타주의가 아니라 목양의 최소한이다.
목양을 포기하고 양을 늑대의 아가리에 밀어넣는 교회, 회중에게서 복음을 빼앗는 목사. 이것이 한국 어떤 교회의 현실이다. 부디 어떤 교회만의 현실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