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찬양이 부흥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아주사, 애즈베리 신화를 넘어, 참된 각성을 분별하다
올림픽공원에서 함성이 이어지고 있다. 2030 청년들이 전면에 섰고, 새벽 두 시에도 대중교통이 끊긴 자리를 지켰다. 참정권이 훼손당했다는 정치적 좌절감이 이들을 움직인 동력이었다. 선관위의 행정 부실은 실제로 있었고, 공정성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분노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부 한국 교회 목사들이 이 집회를, 그 한 복판의 찬양과 기도를 가리키며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아주사 부흥이다.” “애즈베리가 한국에 왔다.” 나는 이 발언들을 듣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신학적 무지인가, 아니면 현장 감동에 압도당한 판단력 상실인가. 어느 쪽이든, 이것은 교정되어야 한다.
아주사와 애즈베리, 팩트 체크
아주사 부흥(1906)을 “성령 운동의 원점"으로 추앙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과장된 신화다.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아버지 Charles Fox Parham은 사기 혐의와 인종차별 이데올로기, 심각한 성적 범죄 혐의를 안고 있었고, 그가 정립한 “방언의 초기 증거(initial evidence)” 교리는 성경에서 뒷받침되지 않는다. 아주사 현장에는 강신술사와 영매들이 뒤섞였고, 지도자 Seymour 자신도 그 혼란을 식별하지 못해 Parham에게 편지로 조언을 구했다. 이것이 “성령의 새로운 부어주심"의 현장이었다. 애즈베리(2023)는 달랐다. 화려한 연출이 없었고, 자발적 기도와 회개, 조용한 예배가 중심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분별 기준 —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죄와 회개, 성경 존중 — 에 비추어 초기 현상 자체를 전면 부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 대학은 웨슬리안-성결 신학 토양 위에 서 있고, 1905년부터 거의 10~15년마다 “부흥"을 반복해온 기관이다. 반복 주기성은 축하가 아니라 질문을 요구한다. 성령의 각성이 특정 기관의 문화적 패턴으로 제도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금, 3년이 지났다. 애즈베리 2023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어떤 지속 가능한 제자도의 열매를 남겼는가? 한국 목사들이 “애즈베리 부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했다.
올림픽공원 집회는 무엇인가
이 집회의 출발은 선관위 행정 부실로 자신의 참정권이 침해당했다는 시민적 분노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2030 청년들이 있었다. 출력물 대신 손글씨 피켓, 조직된 동원 대신 자발적 참여,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이들의 분노는 이념이 아니라 공정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안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고 기도가 이어졌다. 교회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공적 공간에서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언어로 시대를 읽으려 했다는 것, 그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을 신학적으로 정직하게 읽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집회는 정당한 시민적 분노, 진지한 신앙적 참여,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여러 외부의 힘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잡한 공간이다. 그 복잡성을 직시하는 것이, 이 공간을 함부로 “부흥"으로 명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청년들을 존중하는 태도다.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무엇인가
“부흥(Revival)“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으면 그 뿌리는 시편 85편 6절에 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게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부흥은 인간이 기획하거나 특정 조건에서 촉발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권적으로 생명을 부어주시는 사건이다. 역사적 부흥의 특징은 명확하다. 첫째,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다. 1차 대각성(1730-40년대), 웨일스 부흥(1904-5), 평양 대부흥(1907) 모두 그 중심에 죄의 각성과 공개적 회개가 있었다. 평양에서 길선주 장로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그 파문이 교회 전체를 덮었다. 이것은 정치적 불의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는 수직적 각성이다. 둘째, 말씀의 중심성이다.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설교가 뉴잉글랜드를 흔든 것은 경험을 자극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경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경험을 판단하고 생산해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열매다. 마태복음 7장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집회 현장의 뜨거움이 아니라, 그 이후 회중 속에서 지속되는 제자도, 헌신, 교회 생활의 변화가 부흥의 진짜 증거다. 에드워즈 자신이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강조했듯이, 참된 은혜의 감화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
왜 이 혼동이 반복되는가
한국 교회가 올림픽공원을 “부흥"으로 해석하려는 충동 뒤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광장을 비워두었다. 탈정치화를 미덕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특정 정치 진영의 하청 기관으로 기능하면서, 교회는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렸다. 청년들이 광장에서 자발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에게는 낯설고 감격스러운 장면이 된 것이다. 경험과 현상을 신학보다 앞세우는 습관이다. 아주사 이후 오순절·은사주의가 한국 교회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뜨겁고 눈물 나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해석하는 반사 신경이 형성되었다. 성경적 분별 이전에 현상이 먼저 “사인"으로 읽힌다. 부흥에 굶주린 교회의 절박함이다. 한국 교회 성장이 멈추고, 청년이 떠나고, 사회적 영향력이 쇠퇴하는 현실에서, 어디서든 뜨거운 불씨를 보면 그것을 부흥으로 명명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이 절박함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절박함은 분별력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민의 참정권이 침해된 것은 정의의 문제다. 교회는 정의를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도록 부름 받았다(미가 6:8).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공간에서 신앙의 언어로 시대를 읽으려 한다는 것은 격려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첫째, 그 자리에 있는 청년들에게 성경적 언어를 제공하라. 참정권 침해에 대한 정치적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공적 참여는 그 분노를 정의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정화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로마서 13장과 사도행전 17장을, 예레미야 29장의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을 가르쳐라. 둘째,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미혹도 함께 왔음을 가르쳐라. 교회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오염시키고 왜곡하려는 시도가 뒤따랐다. 아주사의 현장에도 강신술사와 영매가 뒤섞였고, 개혁의 열망이 뜨거웠던 자리마다 엉뚱한 방향의 열심이 그 불씨를 낚아채려 했다. 마귀는 선한 움직임을 정면으로 꺾기보다 그 안에 슬며시 들어와 방향을 틀어버리는 방식으로 일한다. 셋째, 진짜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광장의 함성이 아니라, 강단의 말씀이 죄인을 흔드는 사건을 위해 기도하라.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집회가 아니라, 이름 없는 회중 안에서 죄가 각성되고 삶이 변화되는 일을 위해 기도하라. 부흥은 인간이 기획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올림픽공원의 함성은 시대의 징후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읽는 것이 교회의 과제다. 아주사도 아니고 애즈베리도 아니다.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의 감동을 덮어씌우는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뜨거운 현장을 향한 찬사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구비된 냉정한 분별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로 돌아간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기도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