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검고 나도 검다

무조건적 분리주의의 위험성

최근 올림픽공원 예배를 둘러싼 이단 논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지고 있다. 이단성을 지적받은 몇몇 단체들이 침묵하거나 반성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들을 비판하는 기성 교단을 향해 “너희야말로 WCC(세계교회협의회)·WEA(세계복음주의연맹)에 속해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가 더 이단 아니냐"는 식으로 되받아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반박이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수사(修辭)라는 점이다. “네가 나를 이단이라 부르니, 나도 너를 이단이라 부르겠다"는 이 구도는 결국 누가 진리 편에 서 있는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그럴듯하게 상대를 깎아내리는가를 겨루는 소모전으로 끝난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현상의 뿌리에 있는 신학적 태도, 곧 **무조건적 분리주의(unconditional/comprehensive separatism)**의 위험성을 다루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분리 자체는 성경적이며 때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분리의 근거와 범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리주의는 결국 진리에 대한 최종 관심을 잃어버리고, “다 검다"는 상호 비방으로 끝나버린다.

“다 검다"는 수사법의 논리적 문제

이단으로 지목된 쪽이 “WCC·WEA도 이단"이라 말할 때, 이는 사실상 “나는 정통이다"를 입증하는 논증이 아니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물타기(tu quoque, “너도 마찬가지다”) 오류에 가깝다. A의 이단성 여부는 A가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가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야 한다. B(기성 교단)에게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A의 무죄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이단 논쟁은 종종 이 구도로 빠진다 — 즉, 진리 판단이 아니라 “누구를 더 미워할 것인가"의 진영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여기서 무조건적 분리주의가 위험한 이유가 드러난다. 모든 신학적 불일치를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고, 조직적 소속·인적 교류·행사 참여 같은 정황 증거만으로 이단성을 단정하는 태도는, 결국 “나와 다르면 다 이단"이라는 식의 자기 확장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부메랑처럼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오늘 내가 상대를 “그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으니 이단"이라 규정한다면, 내일은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정죄당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피로감이며, 결국 냉소주의로 귀결된다.

신학적 도구: 교리의 층위를 구분하라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유용한 신학적 틀이 있다. 앨버트 몰러(R. Albert Mohler Jr., 남침례신학교 총장)는 2004년에 발표하고 이후 여러 매체에 재게재된 글 “A Call for Theological Triage and Christian Maturity”(신학적 중증도 분류를 위한 제언)¹에서, 응급실의 중증도 분류(triage) 개념을 신학에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교리를 대략 세 층위로 구분한다.

  • 1차 교리(first-order doctrines): 복음 자체를 구성하는 교리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성경의 권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 이신칭의. 이를 부인하면 더 이상 기독교라 할 수 없다.
  • 2차 교리(second-order doctrines): 교회의 실천과 조직에 관련되지만 복음 자체를 훼손하지는 않는 교리 — 침례의 의미와 방식, 교회 정치(장로교/침례교/회중교), 여성 안수 등. 이런 차이는 진지한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이 때문에 상대를 “복음을 모르는 자"로 정죄할 수는 없다.
  • 3차 교리(third-order doctrines): 종말론의 세부 견해, 창조 시기 등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폭넓은 다양성이 허용되는 영역.

몰러의 요지는 명확하다. 분리와 정죄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 1차 교리뿐이라는 것이다. 이 구분을 무시하고 모든 불일치를 1차 교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순간, 우리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역사적으로 반복해서 빠졌던 함정 — 지나친 분리(over-separation) — 에 들어서게 된다. (참고로 개빈 오틀런드는 이 틀을 발전시켜 『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 On: The Case for Theological Triage』(Crossway, 2020)라는 단행본으로 정리한 바 있다.)

역사가 주는 경고: 이차 분리(secondary separation)의 전철

20세기 미국 근본주의 운동은 이 문제를 놓고 이미 한 번 크게 분열한 경험이 있다. 1920년대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이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1923)에서 벌인 싸움은 명확했다 —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므로, 이는 다른 견해를 가진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1차 교리에 근거한 정당한 분리였다.

그러나 이후 근본주의 진영 일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와 교제하는 사람과도 교제할 수 없다"는 이차 분리(secondary separation)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57년 빌리 그레이엄이 뉴욕 전도집회에서 자유주의 교단 목회자들과도 협력하자,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그레이엄 본인뿐 아니라 그레이엄과 협력하는 복음주의자들까지 함께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런 확대된 분리주의는 결국 근본주의 운동 내부를 계속 잘게 쪼개는 결과를 낳았고, 훗날 역사가들은 이를 근본주의가 스스로 사회적 영향력과 신학적 대화력을 상실해 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분리의 원칙이 확장될수록, 분리의 대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진리 수호가 아니라 고립과 자기 정당화만 남는다.

WCC·WEA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소속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보라

이 틀을 가지고 WCC·WEA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정직하게 말하면, WCC는 창설 때부터 신학적 다양성 — 정통 복음주의 교단부터 뚜렷한 자유주의·다원주의 신학을 가진 교단까지 — 을 함께 품는 조직으로 설계되었다. WCC의 기초 신앙고백(Basis)은 다음과 같다.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s a fellowship of churches which confess the Lord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therefore seek to fulfil together their common calling to the glory of the one God, Father, Son and Holy Spirit.”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며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로서, 삼위일체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공동의 부르심을 함께 이루고자 한다.)⁵

이 문구 자체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어, 문구만 보면 1차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직한 비판자들이 오랫동안 지적해 온 것처럼, 이 기초 신앙고백은 성경의 무오성·유일한 권위를 명시하지 않으며, 회원 교단 각자가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사실상 개별 교단에 맡겨져 있다. 그 결과 WCC 안에는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을 지키는 교단도 있고, 종교 다원주의·성경 무오성 부인 등 명백히 1차 교리를 훼손하는 신학을 가진 교단도 함께 존재한다. WEA는 이와 성격이 다르다 — WEA는 처음부터 복음주의 신앙고백(성경의 권위, 대속적 속죄, 회심 등)을 명시적 가입 조건으로 삼는 연합체이며, WCC와 같은 급의 신학적 다원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이 나온다. “소속” 자체는 이단성의 증거가 아니다. 어떤 교단이 WCC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단이 자동으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판단의 기준은 그 교단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가 — 곧 1차 교리에 대한 그 교단 자체의 신앙고백과 실천 — 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저쪽이 WCC에 속해 있으니 우리를 이단이라 부를 자격이 없다"는 반박도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의 결함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덮으려는 시도일 뿐, 자신이 1차 교리 위에 서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나가며 — 진리에 대한 최종 관심

무조건적 분리주의의 진짜 문제는 냉정히 보면 “너무 엄격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 그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진리 자체보다 편가르기와 자기 진영의 순수성 과시에 더 관심이 있다. 모든 상대를 정죄해야 내 편의 순결함이 입증된다는 착각, 이것이 무조건적 분리주의의 심리적 동력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정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작업 — ①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한 자들에 대한 단호한 경고, ②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부차적 문제에서 다른 이들과의 정당한 구별 — 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같은 무게로 정죄하면, 정작 정말 위험한 이단과 단지 견해가 다른 형제를 구별할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누가 더 검은가"를 겨루는 상호 정죄의 확성기 싸움이 아니라, 성경신학에 근거해 1차 교리의 훼손 여부를 냉정히 분별하는 작업이다. 그 분별은 때로 명확한 분리로 이어져야 한다 —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거나, 다른 복음(갈 1:6-9)을 전하는 곳과는 마땅히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분별은 또한 “저쪽도 완벽하지 않으니 나도 정죄받을 이유 없다"는 식의 자기 면죄부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최종 관심을 가진 사람은, 상대의 흠을 찾아 자기 흠을 가리는 대신, 자기 자신이 먼저 복음 위에 바로 서 있는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