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불을 드리지 말라

레위기가 가르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

레위기 9장과 10장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장이다. 9장에서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제사를 마쳤을 때,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제단의 제물을 불태우는 영광스러운 은혜의 사건이 일어났다. 온 백성이 그 영광 앞에 엎드려 환호했다.

그러나 그 가슴 벅찬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0장 1절은 참혹한 비극으로 시작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버린 것이다. 은혜의 불이 순식간에 심판의 불로 돌변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성경은 그들의 죄목을 단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규정한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레 10:1).

이 짧은 구절은 개혁주의 예배 신학의 가장 중요한 뼈대인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를 세우는 결정적인 본문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인간의 고안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백하게 규정하시고 명령하신 방식대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그들에게 예배를 향한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금 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깊은 종교적 감흥과 열정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향로를 들고 지성소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묻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자의적 숭배)’ 예배하려 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 ‘나의 진정성’이나 ‘나의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마음이 진실하고 내 열정이 뜨겁다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예배하든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설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다른 불’이 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경고한다.

예배의 주어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예배의 방식을 결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대우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특권을 가진 자일수록, 그분이 정하신 거룩한 방식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첫째,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공로나 종교적 수양이라는 ‘다른 불’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근거이다(요 14:6).

둘째, 우리의 공예배는 성경이 명령한 요소들로만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일(설교),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 그리고 주님이 친히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인 두 가지 예식(침례와 주의 만찬)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엔터테인먼트나 세속적인 문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프로그램들이 강단을 차지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모세는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아론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대언한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레 10:3).

예배는 죄인이 거룩하신 창조주를 대면하는 두렵고도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우리의 예배가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다른 불’로 채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오직 성경이 명령한 대로,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