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 왜 강단에서 다뤄지지 않는가
정경 밖의 텍스트가 강단에 오르는 이유
최근 몇몇 교회에서 정기 기도회나 특별 성경공부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도마복음을 봉독하고 강해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정경보다 우월한 책으로 여기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진 예수님의 말씀을 낯선 자리에서 다시 듣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언뜻 신중해 보이는 이 접근이 왜 신학적으로 문제인지 답하려면, 먼저 도마복음이 실제로 무엇이고 학계와 교회사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1. 도마복음이란 무엇인가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수난·부활을 서술하는 내러티브 복음서가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전승된 격언·비유·예언적 발언·공동체 규범 114개를 모아놓은 어록집(chreia collection) 장르다. 문서 말미의 콜로폰은 이를 “복음"이라 칭하지만, 정작 서두는 스스로를 “말씀들의 모음"으로 규정한다.
완전한 형태는 콥트어 사본 단 하나로만 전해진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군 코덱스 II의 두 번째 문서가 그것이다. 이보다 앞서 1897년과 1904년,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파피루스 단편 세 개(P. Oxy. 1, 654, 655)가 사후적으로 이 문서의 일부임이 확인되었다. 그리스어 원본은 소실되었고, 현존 콥트어 사본은 그 번역본이며, 그마저 필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것으로 학자들은 본다.
서두는 저자를 “디디모스 유다 도마"로 밝힌다. “도마"라는 이름은 셈어로 “쌍둥이"를 뜻하고, 그리스어 “디디모스” 역시 같은 뜻이다. 곧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는 주장을 담은 이름이다. 이 명칭의 용례는 초기 시리아어권 교회, 특히 에데사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문헌의 성립 배경을 동시리아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연대는 최소 1세기 중반(어록 수집 전통이 태동한 시점)부터 늦어도 2세기 말(옥시린쿠스 파피루스 필사 시점이자 히폴리투스의 최초 인용 시점) 사이로 폭넓게 추정되며, 정확한 연대에 대해 학계 내 합의는 없다.
114개 어록 중 68개가 신약과 병행 구절을 갖고 있어, 신약 의존 문헌이냐 독립 전승이냐를 두고 학계가 가장 첨예하게 갈린다. 이 논쟁에서 주목할 만한 논지 중 하나가 신약학자 니콜라스 페린의 것이다. 그는 도마복음이 원래 시리아어로 저술되었으며, 175년경 성립된 타티아누스의 『디아테사론』(4복음서 조화본)에 문헌적으로 의존한 2세기 후반 문서라는 가설을 정밀한 언어학적 분석으로 제시했다. 이 가설이 맞다면 도마복음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독립 자료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약 이후에 신약을 재해석하며 만들어진 문서로 봐야 한다. 다만 이 가설은 학계에서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논쟁적이며, 확정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다수 학자는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문헌으로 분류한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성원들이 “빛의 영역"에 자신의 기원과 정체성이 있다고 1인칭 복수로 고백하는 대목이 반복된다. 둘째, 십자가·부활 신학이 부재하고 대신 “살아있는 예수"가 전하는 비밀스런 지혜가 구원의 중심에 놓인다. 셋째, 구원이 대속이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인식(자기 안의 신적 요소를 아는 것)과 사실상 동일시된다. 넷째, 원초적 남녀합일 상태로의 회귀를 구원의 완성으로 그리는 창세기 재해석이 나타난다.
출처: Ron Cameron, “Thomas, Gospel of,” i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2), 535–540; Nicholas Perrin, Thomas and Tatia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ospel of Thomas and the Diatessaron, Academia Biblica 5 (Leiden: Brill / Atlanta: SBL, 2002).
2. 정통 교단은 왜 이 문헌을 배제하는가 — 정경비평의 관점
도마복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히폴리투스의 『모든 이단 논박』(Refutation of All Heresies 5.7.20, 222–235년경)이다. 그런데 이 인용의 맥락이 중요하다. 히폴리투스가 도마복음을 정통 신앙의 자료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단으로 규정한 영지주의 분파 나아세네파(Naassenes)가 자신들의 교리적 근거로 이 문서를 경전처럼 인용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즉 초대교회가 남긴 도마복음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 증언은, 이 문서가 정통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이단으로 지목된 분파의 자료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정경 형성사를 다루는 개혁주의 진영의 대표적 학자로 리폼드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신약학 교수이자 정경 연구의 대표적 학자인 마이클 크루거(Michael J. Kruger)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유세비우스가 정리한 초대교회의 4단계 문헌 분류를 소개하며 정경 논의의 틀을 제시한다. 공인된 책(recognized), 논쟁 중인 책(disputed — 야고보서·유다서·계시록 등), 배제된 책(rejected — 헤르마스의 목자처럼 내용은 정통적이나 정경 권위는 인정받지 못한 문헌), 그리고 이단적인 책(heretical). 도마복음은 마지막 범주, 즉 단순히 “정경에 못 든 책"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비정통적이라 배척된 책"으로 분류된다.
이 분류가 후대의 자의적 검열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크루거의 논지는, 정경이 4세기 공의회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1세기 말부터 사도적 권위를 지닌 문헌들이 교회 안에서 기능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은 애초에 그런 광범위한 수용의 궤적에 든 적이 없다. 히폴리투스의 인용이 정통 교부들의 광범위한 인용·설교·전례 사용과는 정반대의 증거라는 점, 즉 이단 분파의 전용 자료였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경성을 판단하는 전통적인 세 기준은 사도성(사도 저작이거나 사도와 직접 연관), 정통성(신앙의 규범과의 일치), 보편성(전 교회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수용)이다. 도마복음은 이 셋 모두에서 탈락한다. 저작 시기 자체가 가장 이른 추정으로도 1세기 말 이후이고, 내용은 앞서 본 대로 영지주의적 구원론을 담고 있으며, 초대교회 전체의 수용 흔적도 없다.
출처: Michael J. Kruger, Canon Revisited: Establishing the Origins and Authority of the New Testament Books (Wheaton: Crossway, 2012);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5.7.20.
3. 개혁주의·침례교 성경론에서 본 근본 문제
여기서부터는 문헌학을 넘어, 우리가 서 있는 신학적 자리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정경의 폐쇄성과 충분성. 1689 런던침례교신앙고백 1장은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충분한 규범이라고 명시한다. 침례교신앙과메시지 2000(BF&M 2000) 역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이자 그 자체로 참된 지식의 기준으로 고백한다. 이는 66권 이외의 어떤 문헌도 신앙과 삶에 규범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고백이며, 단순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계시의 완결성(sufficiency and finality of Scripture)에 관한 신학적 진술이다.
“낯설게 듣기” 프레이밍의 함정. 도마복음을 강단에 올리는 논리는 대개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설교학적으로는 이쪽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도마복음이 “이것이 진리다"라고 직접 주장했다면 신자들은 즉각 경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하게 만드는 낯선 목소리"로 제시될 때, 그 문헌은 은연중에 정경 해석의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된다. 도마복음이 무엇을 묻느냐가, 회중이 정경을 어떤 질문으로 다시 읽을지를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해석적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 — 이것이 정경의 충분성을 실질적으로 침식시키는 더 교묘한 경로다.
영지주의 구원론의 실제 위험. 도마복음의 핵심 구원 도식은 자기 인식을 통한 구원이다. 십자가의 대속, 부활을 통한 칭의, 성령을 통한 중생 —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 요소들이 이 문서에는 부재하거나 다른 틀로 대체되어 있다. “비교하고 질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걸더라도, 이 문서를 정기적으로 봉독·강해하는 실천은 회중의 신학적 문법 자체를 서서히 재구성할 위험이 있다. 신학은 명제만이 아니라 반복된 언어와 실천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분별력 훈련이라는 명목의 역설. “학계의 견해가 갈린다"거나 “맹목적으로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단서는 신학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일반 회중에게는 실효성이 낮다. 정경 형성사와 콥트어 문헌학, 영지주의 배경지식 없이 “복음서와 비교하며 왜 다른지 질문"하는 훈련을 정기 예배 형식으로 감당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정교한 분별이 아니라, 도마복음 특유의 신비적 어조에 대한 막연한 호감일 가능성이 높다.
출처: 1689 London Baptist Confession of Faith, Chapter 1, “Of the Holy Scriptures”; The Baptist Faith and Message 2000, Article I, “The Scriptures.”
4. 결론
도마복음이 신학교 강의실에서 연구되는 것과,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예수의 말씀으로 낭독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정경 66권 외에는 그 어떤 문헌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 그 원칙 하나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어떤 본문을 낭독하고 강해할 때, 회중은 그것을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받는다. 그 자리는 목회자 개인의 지적 관심이나 신선한 발견을 실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 앞에 엎드리는 자리다. 도마복음을 아무리 정교하게 연구했다 해도, 그 연구가 그 문헌을 강단에 세울 자격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반대로 도마복음의 존재조차 몰라도, 정경만으로 신실하게 양떼를 먹이는 목회자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 지적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겨루는 문제가 아니라, 강단이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를 다시 묻는 문제다.
사복음서가 부족해서 낯선 문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가진 말씀을 충분히 깊이 읽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새로움을 향한 갈증은 대개 게으름의 다른 얼굴이다. 익숙한 본문을 다시, 더 깊이 파고드는 수고보다 낯선 문헌 하나를 얹는 편이 언제나 더 쉽고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 강단이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아무리 신중한 단서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도 회중은 서서히 정경 아닌 것에서 답을 구하는 습관을 배우게 된다. 그것을 막는 일이야말로 강단을 맡은 자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