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앞의 청년들, 광장의 청년들
지난 목요일, 피아워십과 기프티드가 심형진, 마이크로닷과 함께한 찬양집회에 4천 명이 넘는 인원이 몰렸다고 한다. 수용 한계는 3천 명. 결국 천 명 넘는 사람들이 예배당 문턱도 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는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화된 바는 없지만,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이야기다.
숫자만 놓고 보면 부흥의 증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식을 들으며 부흥이 아니라 씁쓸함을 먼저 느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갈망이었는지,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사운드를 향한 팬심이었는지, 우리 모두 자문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귀는 즐거운데, 마음은 무감각하다
내가 진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화려한 라인업과 유명한 이름 앞에는 이토록 많은 청년들이 몰려드는데, 어째서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시급한 기도제목 앞에서는 같은 열심이 보이지 않는가.
훼손된 참정권 문제를 두고, 좌와 우를 떠나 수많은 청년들이 이 무더위 속에서 광장 곳곳에 나가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부르짖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시각, 같은 세대의 청년들은 화려한 무대와 유명 인도자를 보기 위해 정원을 초과해서까지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겹쳐 보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스럽다.
이것은 단지 “누가 더 많이 모였나"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무감각함이다. 자기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과 익숙한 이름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나라를 위해 무릎 꿇어야 할 이 절박한 시기에는 무디어져 있는 것. 그리고 이 무감각은 회중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작 그 무대 위에 서서 회중을 이끄는 찬양 사역자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더 아프다. 정말 급박하고 마음 아파해야 할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의 자리를 인도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그 흥행과 인기의 중심에 서 있다.
예배가 소비의 대상이 될 때
언제부턴가 찬양 사역이 연예 산업의 문법을 닮아가고 있다. 누가 인도하느냐, 어떤 라인업이냐에 따라 좌석이 초과되고 미달되며, 사람들은 ‘어느 워십팀’을 선호하는지로 자신의 신앙 취향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예배의 언어가 아니라 공연의 언어다.
예배의 본질은 회중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무대 위의 특정 인물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다. 규정적 예배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는 예배가 사람의 감흥이나 인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과 내용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지금의 대형 찬양집회 문화는 그 원리에서 점점 멀어지고, ‘누가 무대에 서는가’가 사람을 모으는 핵심 동력이 되어버렸다.
진짜 위기
진짜 위기는 자리가 부족해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다. 진짜 위기는, 자리를 채우고도 정작 이 나라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눈감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그 위기의 반대편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광장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이름 없는 청년들의 예배가 있다.
찬양팀도, 회중도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지금 무엇 앞에서 뜨거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