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라는 우상을 넘어, 성령의 생명력으로
Roland Allen의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
오늘날 선교와 목회 현장은 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자본과 거대한 기구, 그리고 복잡한 행정적 통제에 의존하게 되는가? 현지 성도들을 수동적인 피보호자 상태에 머물게 하는 ‘영적 의존성’의 문제는 왜 반복되는가? 롤랜드 알렌(Roland Allen)이 1912년에 출간한 고전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은 선교학의 역사에서 가장 날카롭고도 본질적인 해답을 던져주는 책이다.
사도 바울은 A.D. 47년부터 57년까지 불과 1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4개 주(갈라디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아시아)에 자립적이고 스스로 번성하며 확장하는 완결된 교회들을 개척하였다. 반면 현대 선교와 목회 구조는 엄청난 물자 및 인력을 투입하고도 지속적인 외지 지원 없이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곤 한다. 알렌은 바울이 거둔 경이로운 성과가 결코 당대의 특별한 시대적 특권이나 환경적 우위 덕분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며, 현대 교회가 상실해 버린 ‘현지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신약성경의 근본 원리로 돌아갈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
책의 핵심 내용과 구조적 분석
제1부, 선행 조건: 전략적 요충지, 대중, 그리고 도덕적 환경
- 전략적 요충지(Strategic Points)의 참의미: 바울이 사전에 치밀한 여행 지도를 짜고 다닌 것은 아니며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랐지만, 그가 거점으로 삼은 도시들(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등)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울은 단일 도시가 아닌 ‘로마 주(Province)’ 전체를 하나의 선교 단위로 보았으며, (1) 로마 행정 중심지, (2) 헬라 교육 및 문화 영향권, (3) 유대인 회당 존재 지역, (4) 세계 상업 및 교통의 요충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거점들은 교회가 세력을 구축하는 고립된 수용소나 늪이 아니라, 주변 시골 지역 전체로 복음이 퍼져나가는 ‘샘터이자 화폐 주조소(Mint)’ 역할을 했다.
- 특수 계층론의 반박과 대중 중심(Class)의 복음 전파: 바울의 성공이 소수 엘리트나 준비된 상류층 덕분이라는 주장은 성경적 사실과 다르다. 유대교 회당의 기득권층은 오만과 시기로 바울을 배척하고 박해했으며, 바울의 개심자 대다수는 노동자, 상인, 노예 등 그 사회를 떠받치던 중하류층 대중이었다. 바울은 사회적 신분이나 소위 ‘고지’를 점령하려 하지 않고, 모든 계층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전파했다.
- 열악한 도덕적·사회적 환경(Moral and Social Condition): 1세기 그레코-로마 환경은 결코 현대보다 선교하기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1) 만연한 악령 신앙(Demonolatry)과 미신, (2) 신전의 음란한 종교 의식, (3) 검투사 경기의 잔혹함, (4) 인간의 권리가 박탈된 대규모 노예제도가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울은 환경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도덕적 악조건 속에서도 승리하시는 성령의 능력만을 의존했다.
제2부, 복음 전파 방식: 이적, 재정, 그리고 설교
- 이적(Miracles)의 역할과 유인책의 배제: 바울은 병 고침이나 이적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조건이나 ‘유인책(Inducement)‘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이적은 하나님의 승인 표적이며 악령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포이자 구원의 가시적 표시였으나, 바울은 외적인 표적 자체보다 성령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의 변화를 훨씬 더 높이 평가했다.
- 철저한 재정적 자립 원칙(Finance): 알렌은 바울의 재정 원칙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복음 전파 대상자에게 재정적 지원을 구하지 않는다 (대가성 오해 방지).개척하는 교회에 외지 재정을 대어주어 의존성을 만들지 않는다 (각 교회의 자립).현지 교회의 재정을 선교사가 직접 관리·집행하지 않는다 (현지 교회의 자율 관리). 알렌은 외지 자본으로 거대한 건물과 기구를 먼저 세우는 현대식 ‘미션 스테이션’ 방식이 오히려 현지 교회를 파버리고, 교회를 외부 지배에 종속시키며, 성도들을 수동적 피보호자로 전락시킨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 설교(The Preaching)의 핵심 구조: 바울은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 우상숭배의 죄성,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 그리고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선포했다. 모호한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단호한 영적 결단을 요구했으며, 복음을 거부할 경우 미련 없이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결연함을 보였다.
제3부 & 제4부: 개심자 양육과 자율적 권징, 그리고 일치
- 교회(Church)와 미션(Mission)의 차이: 바울은 선교사가 오랫동안 통제하는 ‘미션’ 조직을 만들지 않고, 불과 몇 달 만에 세례와 성찬, 장로(지도자) 임직을 마친 완결된 ‘교회’를 남기고 떠났다.
- 간소한 전달 내용과 성령의 지배: 바울은 복잡한 신학 체계나 서구적 관습을 주입하지 않고, 필수적인 복음 진리, 성경(구약의 영적 해석),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만을 전달했다. 세례나 임직 시 지나치게 긴 시험 기간을 두지 않고,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고백하면 즉시 세례를 베풀고 현지 신자 중 인격과 덕망을 갖춘 일꾼을 장로로 세웠다.
- 자율적 권징(Authority and Discipline): 음행, 소송, 우상 제물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은 외부 율법이나 법적 권위로 강제하지 않고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격에 호소했다. 범죄자에 대한 권징(출교 등) 역시 선교사 개인이 독단으로 내리지 않고, 성도 공동체 전체가 거룩함과 책임의식을 갖고 자율적으로 시행하도록 유도했다.
- 획일성이 아닌 영적 일치(Unity): 교회의 하나됨은 중앙집중적 행정 조직이나 관습의 획일성(Uniformity)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영적 연대감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과 관습을 이방인 교회에 기계적으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구제 연보 등을 통해 전 세계 교회의 깊은 사랑의 연대를 유지했다.
제5부 결론: 바울 선교의 원리와 정신
바울 선교의 근본 원리는 “율법의 관리자가 아닌 복음의 전파자(Gospel, not Law)”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스스로 물러나는 것(Retire to give way for Christ)”이다. 그 핵심 정신은 현지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Faith in the Holy Ghost)였다.
현대 한국 교회의 선교를 향한 시사점과 적용
알렌의 역사적·신학적 규명은 오늘날 급격한 인구 절벽, 초저출생, 그리고 가속화되는 다문화·이주민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선 한국 교회에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첫째, ‘고지론’(Top-Down)적 엘리트주의에서 ‘대중 중심의 바텀업(Bottom-Up) 생명력’으로의 전환
한국 교회를 오랜 시간 지배해 온 김동호 목사 등의 ‘고지론’은 사회 각 분야의 높은 위치(정치, 경제, 학문 등)를 선점하여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세속적 탑다운 선교관이다. 그러나 바울의 방식은 결코 고지를 점령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회당의 기득권층은 바울을 배척했지만, 일상에서 땀 흘려 일하는 대중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려면 세속적 세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에 연연하는 방식을 버리고, 평범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의 삶터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텀업 복음 운동으로 복귀해야 한다.
둘째, ‘기구적 세력 보존’ 욕망의 포기와 겸허한 현실 수용
신생아 출산율 감소와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한 기존 교회의 세력 축소와 구조적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교회의 건물과 조직, 교세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Survival) 이주민이나 외국인을 단지 ‘빈자리 채우기용 수단’이나 ‘시혜적 구호 대상’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는, 알렌이 경고한 서구 교회의 paternalism(온정주의적 지배)과 제도 유지(Institutional Preservation) 본능의 변형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는 세력 축소를 두려움 없이 수용하되, ‘조직의 생존’이 아닌 ‘복음의 개척’이라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다문화 전략적 요충지에서의 ‘독립적 자립 공동체’ 개척
바울이 로마 제국의 다문화·무역 거점 도시들(고린도, 에베소 등)을 찾아간 것처럼, 한국 교회 역시 산업단지, 이주민 밀집 지역, 외국인 대학가 등 사회인구학적 ‘전략적 요충지(Strategic Points)‘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이주민들을 기존 한국인 교회의 하부 부서나 피보호자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유교적·제도적 전통을 강요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만을 전한 뒤, 이주민 성도들 스스로가 리더를 세우고 예산을 집행하며 예배하는 자립적 다문화 교회(Self-governing, Self-supporting)를 개척하도록 ‘산파와 조력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울이 보여준 참된 선교의 길이다.
나가는 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외형적 세력의 축소라는 위기 앞에서 한국 교회가 잡아야 할 것은 더 견고한 제도나 자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한국 교회가 기구적 보존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내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각 시대의 요충지에 자립적인 신앙 공동체들을 세워나갈 때, 위기 속에서도 복음의 새로운 생명력은 다시금 세상을 향해 역동적으로 유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