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아도, 왜 교회여야 하는가

청년을 위한 건강한 교회론

1. “이 교회는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요”

요즘 청년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교회에서 상처받았어요.” “내가 이 공동체에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여기가 나한테 맞는 교회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결론은 대체로 비슷하다. 로컬 처치(local church, 지역교회)의 예배와 회원 됨은 뒤로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찬양팀이나 선교단체, 혹은 마음에 드는 설교자의 온라인 콘텐츠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헌금도 거기로, 봉사도 거기로, 소속감도 거기서 찾는다.

이 글은 그 마음을 정죄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실제로 상처받은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목회자인 나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의 실재함과, 그 상처에 대한 성경적으로 옳은 반응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에서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이 “교회를 떠나 내 스타일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정당한 선택지로 허락하는가, 아니면 그것 자체가 이미 신학적 오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 자신이 이 질문에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개인이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옵션 중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순종의 자리다. 이것은 어느 신학 전통의 특수한 강조점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의 증언이며, 교회사 속에서 여러 신앙고백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되풀이되어 확인되어 온 진리이다.

2. 성경은 왜 성도에게 로컬 처치를 명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애초에 성경은 왜 그리스도인에게 특정한 지역교회에 속하라고 말하는가. 뒤에 이어질 모든 논의—왜 상처 속에서도 떠나지 않아야 하는가, 왜 파라처치가 지역교회를 대체할 수 없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1)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조직된 자발적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대로 세우시고 붙드시는 그분의 소유다. 사도행전은 이 교회가 처음부터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 모인 구체적 회중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신약에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대부분 이런 특정한 지역 회중을 가리킨다.

(2) 로컬 처치는 은사와 돌봄이 실제로 오가는 자리다.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 공동체가 재산과 소유를 나누고(행 2:44-45),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는(행 2:46)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려” 은사를 나눠 주신다고 말하며(고전 12:7), 그 은사들이 실제로 기능하는 자리는 추상적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아니라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구체적 회중이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는 말씀은, 내가 속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하나님이 친히 지체들을 각각 원하시는 대로 몸에 두셨다는 원리(고전 12:18) 위에 서 있다. 이 상호 필요와 돌봄은 매주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3) 로컬 처치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양의 직분이 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2-3).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이 감독/장로의 자격을 상세히 규정하는 것은, 이 직분이 익명의 콘텐츠 소비자 집단이 아니라 서로를 알고 실제로 돌보는 특정 회중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목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양을 칠 수 없다.

(4) 로컬 처치는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견인을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통상적 수단이다.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목적을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고 말한다. 그 결과 몸은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히 10:24-25)라고 명한다. 신앙의 성장과 견인은 개인이 혼자 콘텐츠를 소비하며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모이는 구체적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권면함으로써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신 과정이다.

(5) 로컬 처치에는 규례(ordinance)를 시행하고 권징을 행할 권세가 주어져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개인적 권면부터 시작해 결국 “교회에 말하라”(마 18:17)고 명하시며, 그 교회에 “매고 푸는” 권세를 주신다(마 18:18). 이 권세는 특정 개인이나 조직에 임의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 회중이라는 구체적 단위에 주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침례(마 28:19)와 성찬(고전 11:23-26)은 개인이 홀로 행하는 신앙 행위가 아니라, 지역교회의 회중이 함께 모여 시행하고 참여하는 언약적 예식이다.

(6) 로컬 처치는 선교의 파송 주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구별하여 보낸 주체는 안디옥 “교회"였다(행 13:1-3). 성경적 패턴에서 선교는 개인이 임의로 시작하는 사역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안수하고 파송하며 책임지는 사역이다.

이 여섯 가지를 종합하면, 로컬 처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으면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양육하시고, 지키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통상적 통로다. 여기까지 동의한다면, 이제 이어지는 질문—상처받았을 때에도 떠나서는 안 되는가, 파라처치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3. 상처 때문에 떠나도 되는가

앞서 살핀 대로 로컬 처치가 하나님이 정하신 돌봄과 성숙의 자리라면, 그 안에서 상처와 갈등이 생겼을 때 취해야 할 성경적 반응도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다.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과 함께,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마 18:15-17)는 것이다. 이 절차의 목적은 회복이지 결별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박해와 위협 앞에서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고 권한다. 성경은 상처나 갈등이 없는 이상적 교회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약의 서신서 대부분이 실제로 갈등하고 결함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반응은 “떠나서 나에게 더 맞는 곳을 찾으라"가 아니라, “정해진 절차를 따라 문제를 다루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머무르라"는 것이다.

이 성경적 원리는 교회사 속에서도 일관되게 재확인되어 왔다. 예를 들어 개혁 침례교 신앙의 뿌리인 1689년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1689 LBC) 26장은, 회원이 자신에게 불쾌감을 준 사람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절차(마태복음 18장의 원리)를 이행했다면, 그 불쾌감을 이유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모임과 성례의 시행에서 스스로 물러나서는 안 되며 교회의 후속 조치를 신뢰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명시한다(필자 요약, 26장). 이는 17세기의 새로운 규범이 아니라, 앞서 살핀 마태복음 18장과 히브리서 10장의 원리를 교회의 실천 지침으로 정리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것이 교회 안의 죄를 방치하거나 은폐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목회자나 성도가 실제로 죄를 짓고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그것은 마땅히 성경적 절차를 따라 정직하게 다뤄져야 하며, 그 절차 자체를 회피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목회적 실패다. 다만 상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바로 “그러므로 지역교회를 떠나 개인화된 신앙생활로 전환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4. 그렇다면 선교단체·찬양팀 중심 신앙생활은 무엇이 문제인가

질문을 좀 더 정밀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선교단체나 파라처치(para-church) 사역, 특정 찬양팀 사역 자체가 죄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단체들은 종종 지역교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특정 기능(선교사 훈련, 캠퍼스 사역, 특정 장르의 예배 콘텐츠 제작 등)을 보완적으로 수행해 왔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역들을 통해서도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문제는 “보완"이 아니라 “대체"에 있다. 2장에서 살핀 로컬 처치의 여섯 가지 기능—장로의 목양, 상호 돌봄, 침례와 성찬의 시행, 마태복음 18장의 권징, 선교의 파송—을 다시 떠올려 보라. 선교단체와 찬양팀은 그 성격상 이 기능들을 수행할 신학적 권위나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회중을 향해 성찬을 시행할 권세도, 회개하지 않는 죄를 마태복음 18장의 절차로 다룰 장로회도, 대체로 없다. 지역교회 회원 됨을 버리고 그 자리를 파라처치가 대신하는 구조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로컬 처치에 지정해 두신 돌봄과 권세의 통로 자체를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5. 회원 됨과 권징 — 통제가 아니라 사랑의 구조

앞서 살핀 마태복음 18장의 권징과 로컬 처치의 회원 됨은, 최근 마크 데버(Mark Dever) 의 9Marks Ministries가 정리한 “건강한 교회의 아홉 가지 표지"에서도 핵심 항목으로 다뤄진다(강해 설교, 복음 교리, 회심과 전도, 회원 제도, 권징, 제자훈련과 성장, 리더십, 기도, 선교—『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 4판 기준). 이 아홉 가지는 새로운 신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글에서 살펴본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한 목록에 가깝다.

이 중 청년들의 질문과 가장 직결되는 것이 회원 제도와 권징이다. 회원이 된다는 것은 “이 특정한 사람들이 나의 신앙 성장과 견인에 대해 책임 있게 관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데 동의하는 행위다. 권징은 회원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죄에 빠진 형제자매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언약적 사랑의 표현이다.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1-2)고 명한다. 반대로, 어느 회중에도 회원으로 소속되지 않은 채 여러 콘텐츠와 단체를 소비자처럼 오가는 신앙생활은, 그 형태상 이런 책임 있는 관계와 권징의 구조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아무도 나를 향해 이런 권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아무도 나를 향해 언약적으로 책임 있는 사랑을 실행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은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빗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에베소서 5:25)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는 흠 없는 이상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 에베소 교회의 첫사랑을 잃음(계 2:4)—신약의 서신서 자체가 결함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심으로 그 교회를 사랑하셨다. 청년들이 마주하는 질문—“이 교회가 나한테 맞는 교회인가”—은 사실 소비자의 질문이다. 반면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치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나는 이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7. 실제적 권면

첫째, 상처 자체를 부인하지 말 것.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성도가 실제로 죄를 짓고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마땅히 마태복음 18장의 절차를 따라 다뤄져야 할 문제이며, 목회자와 장로들이 그 절차를 회피하거나 은폐한다면 그것 자체가 심각한 목회적 실패다.

둘째, 떠남과 이탈은 답이 아니라 회피일 수 있음을 분별할 것. 성경이 가르치듯, 정당한 절차를 밟은 후에는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옳은 반응이다. 온라인 콘텐츠나 특정 단체로의 도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관계 자체를 회피하는 것일 수 있다.

셋째, 회원 됨은 부담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임을 기억할 것. 성경이 그리는 회원 됨은 나의 신앙을 나 혼자 지켜내는 고독한 싸움에서,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는”(고전 12:25) 몸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지역교회의 회원 됨과 권징은 결국 사랑—책임 있게 서로를 붙드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