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밖에 있지 않다

비신자를 향해 ‘영적 싸움’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진짜 위협이 어디 있는지에 대하여

올림픽공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탄핵 정국 속에서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다양하다. 신자도 있고 비신자도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언어로 같은 광장에 서 있다. 참정권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런데 그 광장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상한 선언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구호와 예배 방식에 불편함을 표현하는 비신자 참가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악한 세력입니다.” “지금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와 싸우는 것입니다.”

같은 광장에, 같은 목적으로 나온 사람들을 향해서.

저 사람들이 정말 ‘어둠의 권세’인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종교적 구호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자신은 시민으로서 이 광장에 섰다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악한 세력"이 되는가.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예배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복음이 필요한 이웃이다. 우리가 삶으로, 말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선교의 대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공통된 가치 아래 같은 자리에 선 시민이다. 불편함을 표현한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그에게 “영적 싸움의 대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사람은 더 이상 복음을 들어야 할 이웃이 아니라 제압해야 할 적이 된다.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로 물리쳐야 할 어둠이 된다.

이것이 선교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마 5:44). 그것도 아직 원수조차 아닌 사람을, 단지 불편함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영적 적군으로 규정하는 것은 복음의 언어가 아니다.

이 이분법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빛, 저들은 어둠"이라는 이분법이 성경에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영적 싸움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영적 싸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읽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혈과 육, 곧 사람이 영적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광장에서 불편함을 표현한 비신자는 혈과 육이다. 우리의 씨름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역사하려는 영적 세력이 싸움의 상대다.

이 구분을 무너뜨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전도해야 할 이웃이 제압해야 할 적이 되고, 복음을 들고 다가가야 할 사람에게 영적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이분법을 가장 열심히 가르치는 신학이 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 편"과 “사탄의 진영"으로 나누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복음 전도가 아니라 영적 영토 장악으로 재정의하는 신학이다. 이 신학 안에서는 자신들의 예배와 기도 행위에 저항하는 모든 것이 자동으로 “어둠의 세력"이 된다. 비신자의 불편함도,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도, 심지어 신학적 비판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을 만드는 신학이다. 그리고 그 신학이 지금 광장에서 작동하고 있다.

진짜 적은 어디 있는가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경계해야 할 진짜 위협은 어디 있는가. 찬양 소리가 불편하다고 말한 비신자인가. 아니다. 진짜 위협은 예배라는 형식을 입고, 찬양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기도라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복음의 진리에서 성도들을 조금씩 멀어지게 만드는 세력이다.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되 성경의 복음을 교묘하게 대체하는 자들, 검증받지 않은 권위 아래 성도들을 묶어두는 자들, 감동적인 집회 분위기 속에서 비성경적 신학을 심어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예배 공동체 안에서, 찬양팀 옆에서, 기도 모임 안에서 역사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다른 복음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천사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져온다. 예배처럼 보이는 형식 안에서 온다. 찬양처럼 들리는 소리 속에서 온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광장 밖의 비신자가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예배의 외피를 두르고 “우리 편"처럼 서 있는 거짓 복음이 교회를 무너뜨린다.

성도는 무엇을 향해 눈을 떠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분별의 방향이 있다.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안을 향하는 것이다. 비신자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예배한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를 분별하는 것이다.

기준은 하나다. 그것이 성경의 복음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예배, 이웃을 향한 복음 전도 — 이것이 기준이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웅장한 소리를 동반하더라도, 아무리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더라도, 복음이 아니다.

광장에서 불편함을 표현한 그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가 선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은혜롭게 예배하는 척 서 있는 자의 신학을 점검하라. 그것이 분별이다.

적은 밖에 있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더 위험한 적은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