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이다', 사실 그 말은 체념이었다

에스더서, 영웅 없는 이야기를 영웅담으로 읽어온 한국 교회에 대하여

한국 교회 강단과 여러 성경공부 교재에서 에스더는 종종 “민족을 구한 담대한 믿음의 여전사"로 소개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대단한 믿음의 결심으로 읽히고,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4)는 자기계발 구호가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낳은 본문, 에스더서를 정직하게 읽으면 이 해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Iain Duguid(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가 2005년 취임 강연을 개정해 발표한 논문 “But Did They Live Happily Ever After? The Eschatology of the Book of Esther"가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1. 이름부터 지운 사람

에스더는 신앙의 결단으로 왕후가 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본명은 하닷사, 히브리어로 “도금양나무(myrtle)“를 뜻하는 이름이었고, 언약 공동체 안에서는 아비하일의 딸이라는 족보를 지닌 유대 소녀였다(2:7, 2:15). 그런데 “에스더"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이며, 이방 여신 이쉬타르(Ishtar)를 연상시킨다. 모르드개도 마찬가지다. 그의 본명 뒤에는 바벨론 신 마르둑(Marduk)의 이름이 숨어 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창씨개명과 결이 닿는 지점이 있다. 다만 완전히 같은 사건은 아니다. 일제의 창씨개명은 총독부의 법적 강제였던 반면, 에스더, 모르드개의 이중 이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반의 일반적 관행이었다(다니엘과 세 친구도 동일한 패턴, 단 1:7). 강제성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제국 체제 안에서 살아남고 출세하기 위해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름에서부터 지워야 했다는 본질은 겹친다. 모르드개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왕궁 내내 자발적으로 유대인 정체성 자체를 숨겼다(2:10). 모세 율법 대부분을 어기는 삶이었다는 뜻이다.

“신앙의 여성"이 아니라 “동화(assimilation)에 성공한 이산 유대인"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 건너뛴다.

2.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사실 체념이었다

이 신화의 정점은 단연 4:16, “죽으면 죽으리이다"다. 한국 교회는 이 한 문장을 거의 신앙 결단의 정수처럼 다룬다. “죽음을 각오한 순종”, “믿음의 담대한 결단"이라는 프레임이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그런데 20세기 초 대표적 에스더서 주석가 루이스 패튼(Lewis B. Pa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Esther, ICC, 1908)은 이 구절을 담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체념(resignation)**의 표현으로 읽는다. 그 문법적 근거로 히브리어 접속사 כַּאֲשֶׁר(ka’asher)의 용법을 다루는 BDB(Brown-Driver-Briggs) 히브리어 사전 455b 항목이 인용된다 — “그래, 죽을 거면 죽는 거지"에 가까운 뉘앙스지, “주여 죽어도 순종하겠나이다"의 확신에 찬 도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말이 나오기 직전 상황을 보라. 에스더는 처음에 왕 앞에 나서기를 거부했다(4:11). 모르드개는 그녀가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왕궁 안에서도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그녀가 침묵하면 유대인은 다른 데서 구원을 얻겠지만 그녀와 그녀 아버지 집은 멸망할 것이고, 그녀가 왕후 자리에 오른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일지 모른다고 압박한다(4:13-14). 이 강한 압박 이후에야 “죽으면 죽으리이다"가 나온다.

즉 이 구절은 자발적이고 담대한 신앙고백이라기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내놓은 체념 섞인 순응에 가깝다는 것이 적어도 Paton의 이해이다. 우리가 이 한 구절을 신앙 영웅담의 클라이맥스로 만들 때, 본문이 실제로 그리는 인물의 복잡성과 연약함은 지워진다.

3. 기도 없는 공동체

더 결정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유대 공동체 전체가 금식하고 굵은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썼지만(4:3), 본문 어디에도 “기도했다"는 언급이 없다. 요나서의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조차 금식에 기도를 결합했는데(욘 3:8), 정작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공동체는 그 기도가 생략되어 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왕께 은혜를 구하라(seek mercy)”, “간구하라(plead)“고 말하는 대목(4:8)의 언어는 원래 다니엘 9:3처럼 하나님 앞에서 쓰는 참회 기도의 언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언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왕 크세르크세스를 향해 쓰인다. Duguid는 이를 “인간 차원의 개입에 소망을 둔 것"으로 읽는다. 결코 칭찬으로 읽지 않는다. 위기 앞에서 신앙 공동체가 향한 곳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왕)이었다.

4. 진짜 반전은 사람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상황을 뒤집은 것은 무엇인가. 에스더의 소위 지혜로운 연회 전략이 아니다. 이야기의 진짜 전환점은 6장, 왕이 우연히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다.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단 2:1)이나 다리오(단 6:18)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나 명백한 이유로 잠을 설쳤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잠이 안 왔다.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불면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우연들” — 하필 궁중 일기를 읽자고 함, 하필 모르드개 구명 기록이 낭독됨, 하필 하만이 그 시각 마당에 있었음 — 이 모든 우연의 연쇄가 이야기를 뒤집는다. 에스더의 담력도, 모르드개의 전략도 아니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일하셨다.

5. 심지어 결말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끝까지 심판받지 않고 그대로 왕좌에 앉아 있다. 마지막 절(10:1)에서 그가 하는 일은 에스더가 왕후가 될 때 있었던 면세 조치(2:18)의 역전, 즉, 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부림절은 “원수들에게서 안식을 얻은” 것을 기념하지만(9:22), 그 안식은 부분적이다. 신명기 12:10, 여호수아 11:23,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약속된 “온전한 안식"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에스더서는 완결된 승리담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망을 남긴 채 끝난다.

6. 왜 우리는 자꾸 영웅을 만들어내는가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남는다. 본문이 이렇게 분명히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숨은 섭리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왜 한국 강단은 굳이 에스더를 영웅으로 세우는 쪽을 택했을까.

이건 에스더서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작은 자의 담대한 도전"으로, 요셉은 “고난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로, 느헤미야는 “리더십의 모범"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흔하다. 본문이 실제로 강조하는 것 —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 인간 주인공의 도덕적 모호함, 서사의 결말이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긴장 — 은 설교 강단에서 자주 생략된다. 대신 “우리도 이렇게 살자"는 예화적, 모범적(exemplary) 적용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 경향에는 이유가 있다. 인간 영웅의 서사는 청중에게 즉각적인 자기 적용 지점을 준다 — “나도 에스더처럼 담대해지자”, “나도 다윗처럼 도전하자.” 반면 섭리론적 읽기는 청중에게 당장 실천할 무언가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요구할 뿐이다. 실용주의적 교회성장 담론이 강한 한국 교회 풍토에서는, 즉각 적용 가능한 영웅 서사가 구조적으로 더 잘 팔린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성경 저자가 경계하는 지점이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감춘 유일한 정경 문서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저자의 문학적 신학적 장치다 — 독자로 하여금 표면의 인간 드라마 너머, 침묵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읽어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침묵을 다시 “인간 영웅의 담대함"으로 채워 넣는 순간, 본문이 의도한 신학적 긴장은 사라지고 값싼 자기계발 서사만 남는다.

개혁주의 섭리론(1689 LBCF 5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이 강조하는 것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이차 원인)를 폐기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에스더도, 모르드개도, 심지어 크세르크세스와 하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아니다. 이 구분을 흐리는 순간, 설교는 복음이 아니라 위인전이 된다.

7. 이야기가 진짜 가리키는 곳

에스더서를 “믿음의 영웅 서사"로 읽는 것도, “하나님이 부재한 세속 생존기"로 읽는 것도 둘 다 본문을 잘못 읽는 것이다. 본문의 실제 초점은, 이름을 지우고 체념 속에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들 저 너머에서, 이름도 언급되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에스더서가 진짜 가리키는 곳은 에스더의 용기가 아니라, 훗날 자기 백성을 위해 스스로 저주를 짊어지신 참된 왕이다(엡 2:14-17). 에스더서를 “영웅 이야기"로 소비하는 순간, 우리는 이 책이 예비하고 있던 더 큰 이야기 — 그리고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 를 놓치게 된다.


참고: Iain M. Duguid, “But Did They Live Happily Ever After? The Eschatology of the Book of Esther,” 원논문(2005, 취임 강연 개정판); 동일 저자, Esther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 P&R Publishing, 2005). 4:16 관련 문예적 해석은 논문 각주 22에서 재인용된 Lewis B. Pa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Esther (ICC, 1908), 226 및 BDB 455b를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