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
부활주일 강단을 정치에 내어준 한국교회를 향하여
2026년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 73개 교단, 7천여 명이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라는 수식어는 화려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은 그 화려함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이재명 대통령이 부활주일 예배의 강단에 올라 축사를 했다. 그리고 교회는 박수를 쳤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고질적 질병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강단은 누구의 것인가
먼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강단은 무엇을 위한 자리인가?
강단(pulpit)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다. 그것은 설교자가 인간의 지혜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자리다. 칼뱅(John Calvin)이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throne of God)에 비유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단의 신학적 본질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었다.
이번 예배에 참석한 한 교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강단에 올라 축사를 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예배에서 드려지는 기도, 찬양,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축사가 있는 걸 처음 본다. 무엇보다 강단은 신성한 곳인데 자격이나 자질이 없는 정치인이 올라간 것은 신앙의 선을 넘는 것이다.”
맞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강단은 대통령이 오르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부활주일이라는 맥락의 무게
이 사안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것이 그냥 어느 주일이 아니라 부활주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부활주일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 15:17). 부활은 기독교 신앙 전체의 기초이며 복음의 절정이다. 그 날, 그 예배에서 성도들이 선포해야 할 유일한 메시지는 오직 하나다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런데 그날 강단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CBS 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는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보다도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에게 소망을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어버리지 않으시며 국민 화합과 실익 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교회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그는 이어 “이쯤 되면 박수 한번 해주셔야죠”라며 청중에게 박수를 유도했고, “도대체 저기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잠시 남으라고”라는 농담까지 덧붙였다.
이 발언을 신학적으로 해부해보자.
소 목사가 사용한 언어 구조를 보라.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분 / 어렵고 힘든 자들에게 소망을 일으켜 주시는 분 / 낮은 곳을 잊지 않으시는 분.” 이 언어는 단순한 정치적 덕담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의 언어다. 고난 → 낮아짐 → 소망을 일으킴이라는 서사 구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바로 그 문법이다. 소 목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리스도론적 언어를 한 정치인에게 전용(轉用)했다. 부활주일 강단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언어로, 살아있는 정치인을 칭송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아첨의 문제가 아니다. 신학사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다.
1934년, 나치 치하 독일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히틀러를 “독일의 선지자”로 칭송하고 복음의 언어를 그에게 적용했다. 이에 맞서 칼 바르트(Karl Barth)가 주도적으로 기초한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 1934)은 그 첫 번째 명제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시며, 우리가 삶과 죽음 속에서 듣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분이시다. 우리는 교회가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거짓 교리를 거부한다.”
바르멘 선언이 저항한 것은 노골적인 신격화만이 아니었다. 복음의 언어 구조 자체를 세상 권력자에게 적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언이 “거짓 교리”라고 명명한 행위였다. 소강석 목사의 환영사가 사용한 언어는 정확히 그 구조 위에 서 있다. 바르멘 선언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날 강단에서 “다른 권세”가 복음의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박수를 치지 않는 사람은 이따 남으라”는 농담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이 상황의 본질을 드러낸다. 예배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반응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정치 권력자를 향한 환호를 사실상 강제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순간, 그 자리는 예배당이 아니라 정치 집회장이 되었다.
모순의 극치 — 한 손에 칼, 한 손에 성경
이 사건을 단순히 정교분리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종교의 정치 개입은 반란 행위”라고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국무회의에서도 “조직적·반복적 정치 개입 시 강제 해산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현재 민주당이 사실상 주도하는 일명 종교법인 해산법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교회의 설교와 사회적 발언이 언제든지 정치 개입으로 해석돼 교회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그런데 부활절 불과 나흘 전인 4월 1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전국에서 모인 1만여 명의 성도가 바로 이 종교법인 해산법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집결했다.
생각해보라. 성도들이 국회 앞 아스팔트 위에서 교회의 생존권을 외치던 바로 그 주간에, 그 교회를 위협하는 정책의 주체가 부활주일 강단에 올랐다. 그리고 목자들은 박수를 쳤다. 한 목회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활은 불의와 타협하는 상징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회개 없는 권력과의 결합은 부활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배신이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
이 대통령은 부활주일 SNS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19)”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고, 예배 축사에서도 같은 기조를 이어갔다.
얼핏 들으면 경건해 보인다. 그러나 그 말씀의 맥락을 기억하라. 요한복음 20장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죄 사함과 성령의 능력으로 파송되는 선교 공동체를 향한 선언이다. 그것은 정치적 화합의 슬로건이 아니다. 성경을 수사학적 도구로 빌려 쓰는 것은, 그 말씀이 아무리 정확하게 인용되었다 하더라도, 말씀에 대한 모욕이다.
더 근본적으로, 교회를 해산할 수 있는 법안을 손에 쥔 채로 강단에 올라 “평화”를 외치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경고했던 바로 그 소리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6:14).
문제는 대통령이 아니라 교회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칼럼의 핵심 비판은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의 논리로 움직인다. 주어진 기회가 있으면 활용한다. 그것이 정치다.
문제는 그 자리를 내어준 교회다.
또 다른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것 아니냐.” 이 우려는 정당하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권력과의 친밀함을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착각해왔다. 5공 시절 전두환을 여호수아로 칭송하던 그 행태가, 2026년 부활주일에도 반복되었다. 권력자가 바뀌었을 뿐, 구조는 동일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이번 사태는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천지일보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했을 때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들은 참회하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진보적 교계 단체들이, 이번에는 잠잠하다. 정교유착은 내 편일 때는 신앙의 결단이 되고, 상대편일 때는 반헌법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칙은 권력자의 이름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부활의 본질은 타협이 아니라 증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 권세와의 화해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승리의 선포다. 빌라도의 관저도, 헤롯의 궁정도, 로마 제국의 인장도 무덤을 막을 수 없었다. 부활은 그 모든 세상 권력의 한계를 폭로하는 사건이다.
초대 교회가 “예수는 주(主)시다”(Kyrios Iesous)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이사는 주가 아니다”라는 정치적 저항의 언어였다. 부활 신앙은 본질적으로 세상 권력을 상대화한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예배가 세상 권력자를 칭송하는 자리로 전락하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에 묻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강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의 예배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권력인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을 때,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의 징표는 아니다. 때로 그것은 경고의 신호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누가복음 6:26).
부활주일은 박수를 받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는 날이다. 강단은 권력자가 오르는 연단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다.
그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