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단인가
한 강단에서 들려온 풍경에 부쳐
설교 제목과 강단의 풍경
최근 한국 교회의 어느 강단에서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전해졌다. 그 설교가 전해진 같은 주일, 같은 강단 위에서 벌어진 일들을 두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깊은 상처를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는 사역에서 물러났고, 어떤 이는 교회를 떠났다. 외부에서 어렵게 청빙된 찬양 사역자 부부가 사임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설교 제목이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묻고 싶다. 그 주일, 그 강단에서, 누가 양 무리를 흩었는가.
첫 번째 풍경 — 찬양팀을 향한 공개적 면박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날 강단에서는 찬양팀의 무대 배치를 두고 상당한 시간이 할애되었다.
좌우 인원을 맞추라, 남녀를 짝지어 세우라, 앞뒤 줄을 다듬으라.
음향 모니터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찬양팀의 정당한 요청에 돌아온 답은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못해서 자기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라는 식의 답. 강단에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될 비하 어휘가 등장했다.
찬양 사역의 본질에 관해 신약은 한 번도 무대의 좌우 균형을 말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예배의 정의는 “영과 진리로”(요 4:24)였다. 골로새서 3:16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 강단에서 무대 포메이션을 한 시간 가까이 따지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본질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정직한 자기 고백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풍경 — 강단에서의 부적절한 농담
같은 시기, 같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한 발언을 두고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특별 찬양을 부른 한 자매 성도를 가리키며, 유부남인 설교자가 강단에서, 회중 전체가 보는 앞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의도가 담긴 농담을 한 것이다. “아내가 들으면 곤란하니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을 돌렸다”며 그것을 자신의 지혜라 자랑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단순한 실언으로 무마될 수 없다. 신학적 진단 이전에 사회적·법적 차원에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과 「양성평등기본법」이 정의하는 성희롱의 핵심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다. 강단이라는 가장 강력한 권위의 자리에서, 회중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특정한 자매 성도를 지목하여 결혼 운운하는 발언을 한 것은 — 말을 어떻게 돌렸든 — 이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더라도, 성희롱의 성립 기준은 가해자의 의도가 아니라 합리적 피해자의 관점에서 본 객관적 부당성이다.
신학적으로는 더 무겁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라고 말한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첫째 표지는 성결이다. 부적절한 농담을 “들키지 않게 돌린 것”을 지혜라 부른다면, 그 지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약 3:15)이다.
권위인가, 권위주의인가
목회 권위는 성경이 분명히 인정한다(히 13:17, 살전 5:12-13). 그러나 같은 본문이 같은 호흡으로 그 권위의 자질을 규정한다.
베드로전서 5장 3절은 장로들에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라고 명한다. 여기서 “주장하는 자세”란 단어는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 예수께서 이방인 통치자의 행태로 명시적으로 금하신 바로 그 단어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 20:25-26).
찬양 사역자의 음향 요청을 인격 모독으로 받아치는 것, 무대 배치를 두고 강단에서 사역자들을 줄 세우는 것, 자매 성도를 두고 강단에서 농담을 자기 지혜라 자랑하는 것 — 이것은 권위(authority)가 아니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다. 양자의 차이는 본질적이다. 권위는 양 무리를 살리고, 권위주의는 양 무리를 흩는다. 권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고(고전 4:1), 권위주의는 자신을 작은 그리스도로 안다.
디모데전서 3장 2-3절이 그리는 감독의 자질은 명확하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디도서 1장 7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위에서 묘사한 강단의 풍경 가운데 어느 장면이 이 자질의 어느 항목과 양립하는가. 단 한 항목도 양립하지 않는다.
흩어진 양들
이런 풍경 끝에 떠난 사람들이 있다. 외부에서 어렵게 청빙된 찬양 인도 사역자 부부가 사임했다. 다수의 평신도 사역자가 상처를 입고 사역에서 물러났다. 일부 가정은 아예 교회를 떠났다.
마태복음 18장 6절의 예수의 말씀은 무겁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다”의 헬라어는 영어 “scandal”의 어원이며, 본래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을 뜻한다. 강단에서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 관한 예수의 진단은 단호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어원 하나를 더 짚자. “사단”의 헬라어의 본래 의미는 “고발자, 대적자”다. 그러나 신약이 사단을 묘사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도둑”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양 무리에서 양을 빼앗아 가는 자, 흩어버리는 자.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을 설교한 그 주일에, 누가 양들을 흩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목사를 비판하는 일은 즐겁지 않다. 그러나 강단의 침묵이 강단의 죄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한국 교회의 지난 수십 년 역사 — 셀 수 없이 반복된 강단의 추문과 그것을 덮어준 동료 목사들의 침묵 — 에서 이미 너무 많이 배웠다. 더 이상 침묵은 미덕이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을 가장 정확히 식별하는 방법은, 강단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지 않고 강단 자체를 성경의 자(尺)로 재는 것이다. 그 자는 베드로전서 5장이고, 디모데전서 3장이며, 마태복음 18장과 20장이다. 이 자로 재었을 때 부족함이 드러나는 강단이라면 — 그가 누구이든, 얼마나 큰 교회의 담임이든, 얼마나 오래 사역했든 — 회개해야 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 저주는 어느 익명의 비판자의 말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