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
감각을 잃은 교회에게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태복음 16:3)
교회 밖은 지금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가
2026년 5월,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전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평소라면 침묵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사저에 머물던 전직 대통령들이 부산으로, 원주로 나선다. 이 사회의 시민들은 지금 이 시간이 평범한 시간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그 감각이 옳든 그르든, 정확하든 과장되었든, 사람들은 지금 뭔가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교회는 오늘도 조용하다.
바리새인의 후예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무지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성경을 외웠고, 율법을 연구했고, 종교적 예민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날씨 하나는 기막히게 읽는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내일 날씨를 말하고, 아침 하늘이 흐리면 오늘 비를 예보한다. 그러나 바로 너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것 —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이 사건 — 은 읽지 못한다. 왜인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기득권, 유지하고 싶은 자리,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는 현재 질서가 있었다. 그것이 눈을 닫게 했다.
오늘 한국 교회를 보라. 구조가 동일하다.
한국 교회의 감각 마비는 우연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시대를 읽지 못하는 것은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쳐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무감각이다.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동안, 교회의 관심축은 완전히 내향화되었다. 주일 인원, 헌금 액수, 예배당 규모. 교회가 교회 자신의 유지와 팽창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동안, 세상을 향한 감각은 퇴화했다. 퇴화는 처음엔 서서히, 그다음엔 빠르게 진행된다.
그리고 이 무감각을 정당화하는 신학 언어가 생산되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 언뜻 옳게 들린다. 그런데 이 명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라. 새벽기도에서 “우리 사업 잘 되게 해달라”, “아이 대학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관여가 아니다. 그러나 나라의 방향을 놓고 “하나님, 이 땅을 붙드소서”라고 탄식하는 것은 관여다. 개인 이익을 위한 기도는 신앙이지만, 공동체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한 기도는 정치화다. 이 이중성은 성경적 분별이 아니다. 안락함의 방어막을 신학으로 위장한 것이다.
교회가 시대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를 읽으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감각이 살아 있으면 책임이 생긴다. 보이면 반응해야 하고, 반응에는 비용이 따른다. 반대가 생기고, 잃는 것이 생기고, 선택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택한 것은 감각을 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감각에 “영적 중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영적 중립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짓말이다.
분별이 곧 정치 편향은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이 면죄부는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라는 것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느 진영이든 정치 권력이 강단을 장악하는 순간, 교회는 예언자적 권위를 잃는다. 교회는 어느 진영의 군목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눈을 감아야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치적 중립과 영적 무감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땅의 역사적 흐름을 감지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씨름하며, 이 시대와 다음 세대를 위해 탄식하는 것 —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제사장의 직무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요청한 것은 그것이었다. 포로지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렘 29:7).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리였다.
한국 교회에 지금 요청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최소한 기도하라.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라. 성도들이 시대를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의 빛을 비추라.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최소한이다.
그 최소한조차 하지 않는 것을 신중함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눈을 감기로 작정한 교회에게
나는 지금 한국 교회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도 있고, 두 눈도 있고, 감각 기관도 살아 있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기로 결정했다. 보고 있지만 보지 않기로 했다. 더 편하고 더 안전하고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무엇인가. 역사가 움직이는 현장에 교회가 없다. 기도도 탄식도 분별도 중보도 없다. 세상은 이 나라의 미래를 놓고 씨름하는데, 교회는 행사 기획서를 들고 있다.
이것은 영적 겸손이 아니다. 영적 직무유기다.
바리새인들은 날씨는 읽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시간임을 읽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다(마 16:4). 그 책망이 2026년 한국 교회를 향해 반향하고 있다.
날씨 읽는 데는 예민하고, 시대 읽는 데는 무감각한 교회.
그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마 5:13).